나는 하고 싶은 게 정말 많다. 하고 싶은 게 많으니 되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런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일본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바느질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선생님도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잠깐 교회에서 일본어 초급 선생님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말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책을 보면서 옷을 만들었다. 백화점에 가서 예쁜 옷이 나오면 팸플릿을 들고 와서 집에서 그걸 보고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신상이 책 보다 백화점이 늦게 나왔었다. 책을 보고 디자인해서 백화점에 나왔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랬었다. 가끔은 옷을 사주기도 했지만 백화점 옷은 비싸고 또 원단값을 알기 때문에 옷을 사는 건 왠지 아까웠다. 그 정도면 나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사려다가도 만들어 입혀야지 하는 생각이 더 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렇게 만들어 입혔나 싶다. 더구나 패턴 그리는 것을 따로 배운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명동 중앙우체국 뒤에 갔더니 외국 잡지책이 많이 있는데 거기에 아이들 옷 만드는 책이 있었다. 그것도 일본어로 된 책이었다. 일본어를 모르지만 무조건 사 왔다. 옛날부터 논노라던가 일본 잡지를 사서 봐왔기 때문에 그리 거부감이 들지 않았었다. 그림만 보는 정도였지만 일본 잡지를 참 부지런히 도 사서 보곤 했었다. 옷 만드는 책도 그림만 보려고 샀다. 그런데 패턴을 그릴 수 있게 뒤에 따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일본어는 모르지만 숫자는 세계 공용이기 때문에 숫자를 보고 그대로 그리면 되는 것이었다. 맘에 드는 옷을 골라 패턴을 그리고 원단을 사다 옷을 만들다 보면 쉬운 옷보다는 거의 어려운 옷이 더 많았다. 쉬운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걸 만들어줘야지 하고 보면 복잡한 패턴이었다. 그 당시에 여동생들이 비슷하게 결혼을 해서 아이 들고 다 고만고만했는데 동생들도 내 패턴을 가져다가 모두 옷을 만들어 입혔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응용해서 잘도 만들었다. 책을 보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나보고 패턴을 그려달라고 했다. 그 패턴 하나로 또 만들고 나눠주고 했다. 동생들 뿐만 아니라 내 친구도 그랬다. 딸아이와 개월 수도 비슷하고 해서 어느 날은 우리 집에서 하루 종일 아이 옷 만들어 주다 하루가 가는 날도 있었다. 지금은 엄두도 안 나지만 밤새워가며 미싱을 돌려 만들기도 했었다.
미싱 얘기가 나왔으니 미싱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옛날 손으로 돌리는 미싱이 있었는데 그걸 떼어내고 모터 미싱으로 만들어 달았다. 앉은뱅이 미싱이 된 것이다. 하루 종일 아이 옷을 만들고 나면 허리도 무지 아팠지만 옷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딸아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가졌을 때 아기 옷은 엄마가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 그러마고 대답은 했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은 사라고 하고 나도 사주고 말았었다. 손녀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지만 지금도 만들 엄두는 나지 않는다. 다섯 살이 되면 내손으로 꼭 만들어 주려고 한다. 꿈 리스트에 적어 놓았다. 얼마 전 김미경 TV에서 방송 중에 김미경 작가의 엄마가 의상실을 하는데 연세가 있으시니 누군가 배워서 이어받아 갔으면 하는 내용이 있었다. 듣는 순간 누구 말대로 십 년만 젊었어도 당장 가서 매달려서 배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어릴 적 꿈이 디자이너였는데... 생각해보니 내 꿈이 디자이너였다. 꿈만 그랬다. 그게 꿈이었는지도 잘 모른다. 나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쪽으로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게 재능 인지도 모르고 살았고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 옷을 만들다 보니 그제야 생각이 난 것이다. 내 꿈이 디자이너였다는 것이. 그 방송을 듣는 순간 그저 십 년만 젊었으면 이었다. 그마저 핑계 인지도 모른다. 아니 핑계 맞다. 어쩌면 꿈이 또한번 사라지는 순간이었는지도.
그러고 보니 나는 바느질을 좋아하긴 하나보다. 한때 퀼트를 배워서 인형을 만들기도 하고 퀼트 카페를 하는 게 꿈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퀼트는 배울수록 돈이 자꾸만 들어갔다. 무엇을 배우든 간에 투자 없이 안되지만 옷을 만들어 입힐 때도 그랬지만 소소하게 옷값 못지않게 돈이 들었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옷을 만들어 입힌다는 뿌듯함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퀼트를 배우게 된 것은 돈벌이로 생각해서 배우기 시작했다. 퀼트를 배워서 퀼트 샵을 열던가 퀼트 카페를 하던가, 퀼트 카페를 하는 게 꿈이기도 했었다. 퀼트를 배우기 위해 지방에서 서울까지 유명한 선생님을 찾아 배우러 다녔었다. 퀼트 샵을 하려면 좋은 선생님에게 배워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지방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어차피 서울에서 배워와서 가르치기 때문에 같은 지방에서 배우고 싶지 않았었다. 또한 같은 패턴으로 배우는 방식을 싫어했던 터라 내가 배우고 싶은 패턴의 선생님을 찾아 가는 게 맞기도 했었다. 퀼트는 거의 수입원단이었고 그에 따른 소품도 그 당시 선생님이 미국에서 공수해 온 거라 저렴하지 않았다. 원단 욕심에 갖고 싶은 소품 욕심에 배울수록 돈이 더 많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되는 일이지만 지금도 넉넉한 생활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도 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돈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때여서 결국에는 고민에 고민을 하다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것 같아 퀼트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재료비뿐만 아니라 교통비도 만만찮게 들었고 서울 오가며 눈에 띄는 것을 하나씩 사게 되니 몇 배로 드는 것 같았다. 고급반에 강사반, 패턴반, 인형반 따로 하자면 몇백은 거뜬히 들 것 같았다. 그걸 마친다고 바로 샵을 낼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그 당시 내 지론은 나를 위해서 한달에 요만큼은 투자를 하고 살자 였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대신 남들처럼 좋은 옷, 비싼 옷, 비싼 화장품 안 쓰고 그 돈을 내가 좋아하는 곳에 투자하자 였다. 그렇게 했어도 날이 갈수록 나에게 투자되는 돈이 점점 많아지니 집에 미안하기도 하고 그만큼 여유 있게 생활하기에는 부족했기에 퀼트를 접기로 했다. 가끔 집에서 바느질을 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이어가지는 못했다. 조금이라도 가게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실은 가만히 있는 게 도움되는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퀼트를 배워서 가게를 한다는 생각을 접고도 나는 끊임없이 무얼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일본어를 배우면서 다도를 알게 되었다. 어떤 프로그램에서 다도 소개를 해야하는데 아는 게 너무 없어서 기초라도 좀 배워야겠다고 찾던 중 문화원 원장님을 알게 되었다. 다도를 배우기에는 느리고 느리게 진행이 되었지만 살아가면서 깨우쳐야 할 지혜와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하루 프로그램을 위해 찾아간 곳이 꿈에 더하기를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빠짐없이 문화원을 다니면서 차와 생활에 도움이 되는 예절 등 여러 가지를 배웠다. 그러다가 시골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시골에서 자연염색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내가 배운 바느질, 다도 그리고 염색.. 어울렸다. 내 나이 60세가 되면 동생들과 아뜰리에를 하자 했는데 배워놓으면 쓸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세 가지 접목시켜서 무얼 해도 어느 것 하나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있으랴 싶었고 타도 시에 주소지가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더군다나 수업료도 무료로 진행되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4개월을 있기로 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염색을 배웠다. 그동안 문화원은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시골에서 거리도 거리지만 평일 시간이 겹쳐 갈 수도 없었다. 염색을 배우는 4개월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염색 과정이 끝나갈 무렵 교수님의 제안으로 나는 카페에 근무하게 되었다. 잠깐 염색만 배우고 가려던 것이 눌러? 안게 된 것이다. 카페는 시골 동네에서 뚝 떨어진 한가한 곳에 있어 카페를 가는 길은 너무 좋았다. 솔직한 마음은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염색을 배우는 동안에 이곳에 일거리가 있게 해 주세요 하고 날마다 빌었었다.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염치없지만 아버지께 카페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카페에 근무하면서 문화원에 못가는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맥이 끊기면 다시 배우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고 다도라는 끈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를 아는 것보다 삶의 지혜를 배우러 가는 게 맞다고 할 정도로 배울게 많은 곳이었다. 좀 가까운 곳에 다도를 가르치는 곳이 없을까 하다가 몇 년 전에 충주에 놀러 갔다가 찍어놓은 다도교실 전단지가 떠올랐다. 전화를 했더니 그때까지 하고 있었다. 검색을 해보니 시골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카페가 시작되기 전 오전에 찾아갔다. 문화원 원장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전통을 중요시하고 전통도 배우지만 현실에 맞게 응용하는 방법도 알려주셨다. 차를 계속 배우면 카페에 도움도 되고 더 좋을 것 같았다. 카페에서 차를 이용한 음료를 만들어 적용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선생님께서 그런 노하우를 많이 알려 주실 것 같았다. 무엇보다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마인드나 마음 쓰심이 너무 맘에 들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 카페 출근 전에 수업을 들으러 갔다. 문화원에서 배웠던 느림의 법칙과는 다르게 다도도 새로이 배우게 되고 차에 대해 단계별로 배울 수 있었다. 방학이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다례원에 가는 즐거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다례원에 가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차에 대해서 다도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지만 차 마시는 그 시간만큼은 너무 좋았다. 세상 모든 어려움을 잊고 오로지 그 시간에 몰두할 수 있었다. 카페에 음료를 적용해 보기까지는 배움의 시간이 있어서 시도해 보지는 못하고 카페를 그만두게 되었다. 주말에만 내려가서 카페를 봐주다가 마침 다른 분이 오게 되어 완전히 그만두었다. 카페는 그만두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다례원은 계속 갔었다. 그러다가 오월부터 계속 일이 생겨 못 가게 되었다. 못 가는 동안 한동안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차도 집에서 내리면 왜 그리 맛이 안 나는지... 선생님이 내려주는 차가 너무 마시고 싶을 때가 많았다. 다음 주에는 꼭 가야지 한 게 벌써 4개월이 되었다. 지지난주인가에도 간다고 했다가 못 갔었다. 벼르고 벼르다가 오늘 드디어 다례원을 다녀왔다. 표현은 못했지만 다례원의 풍경과 약간 큼큼한 여름 냄새는 고향에 온 듯 너무 반갑고 좋았다. 선생님이 내려 주는 차를 마셨다. 상콤한 과일향이 첨가된 가향홍차였다. 그 시간을 얼마나 그렸던가. 온몸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시고 다시 짜이 한잔을 데워 주셨다. 그동안의 맛보다 가장 대중적인 맛을 구현해내셨다고 하시면서. 부드럽고 정말 순했다. 그렇다 해도 어느 프랜차이즈에서 판매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짜이를 다 마셔갈 때쯤 다른 분이 오셔서 함께 수업을 들었다. 그동안 배운 것도 가물거리지만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차의 세계로 빠져 드는 것 같다. 선생님은 차뿐만 아니라 그림, 도자기, 명상.. 정말 많은걸 하신다. 정말 멋진 마인드를 가진 분이다. 그런 선생님을 나도 닮고 싶어 진다. 나도 선생님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갈길이 멀지만 말이다.
이렇게 차를 배우고 바느질을 배우고 염색을 배우고...누군가는 너는 뭐 그렇게 배우는 게 많니? 하고 물어본다. 아직도 배울 게 있냐고 물어본다. 정말 열정이다 라고 하는 친구도 있다. 나는 그러면 할머니 되어서 심심할까 봐 미리 배워둔다고 얘기한다. 그때 다 써먹을 거라고 얘기한다. 너희들 놀고 할 일 없을 때 내가 가서 가르쳐 줄 거다라고 얘기한다. 이 모두가 어쩌면 일본어를 배우면서 시작된 것 같다. 다도, 바느질, 염색..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조금씩만 섞어도 무어라도 해 낼 것 같았다.. 그래서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중요한 건 끝까지 제대로 완성한 게 없다. 아니 끝까지 했어도 지금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손은 놓으면 그렇다. 그 처음이 어디인지 가물거린다. 그래서 손을 놓고 싶지 않은데 욕심인 거다. 한 가지도 못하면서 무슨 수로 다 끌고 간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은 모두 손을 놓았다. 손을 놓았다기보다 잠시 쉬고 있는 것이다. 실은 도심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에 환경이 많이 열악하다. 지금의 내 환경이 열악하다. 가끔 소소하게 해 보지만 그걸로는, 그렇게 해서는 절대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잠시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블로그를 하게 되었다. 블로그를 하면서도 하나씩 할 수 있지 않나? 맞기도 하다. 그런데 두 가지 세 가지를 할 수가 없다. 여자의 뇌는 다중 프로그램이라서 이거 하면서 저거를 하고 한다지만 그것도 나이가 젊을 때 이야기인 것 같다. 하루에 한 가지 하기도 벅차다. 그렇다고 블로그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포스팅하나 올리지 못하면서 하루가 지나가는 걸 보면 마음이 무겁다. 나에게 맞는 건 바느질이라고 생각했던 어느 날 독서를 해야 하는 걸 알게 되었고 디지털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의 비어있던 머리를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얼마나 무지하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 시대라고 한다. 지금 배워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디지털 세상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건, 바느질을 하건 다도를 하건 염색을 하건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블로그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이 먹어 이 어려운 세상에 발 딛고 가려니 힘들다. 너무 힘들다. 머리도 아프다. 없는 생각 쥐어짜느라 머리가 아픈 게 아니라 빠개질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내느라 더 아프다. 아픈 와중에 그걸 발견하고 꾸려가려니 마음이 먼저 무겁다. 생각이 굳어서 움직여지지 않는다. 꼬여있는 실타래를 어떻게 하나씩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해야 된다. 그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면 더더욱 해야 한다. 난 복잡한 걸 좋아하니 잘 풀어갈 거라 믿는다. 어려운 걸 좋아하니 즐겁게 하리라 믿는다. 김미경 작가의 말씀처럼 온라인 안에 내 빌딩을 짓는 거라 생각하면서 기초공사를 탄탄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려면 투털 거리지 말아야 한다. 동생들과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서 내 나이 60세가 되면 정말 짠하고 그 모든것을 풀어보리라. 즐거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있을 모습을 그리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