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져 놓았던지 안해놓았던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그 천차만별인 삶의 일부분을 누군가를 위해서 아주 잠깐의 희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건 희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잠깐의 시간을 내는 것이다. 단 5분도 안되는 시간을 할애 못하고 서운함을 주었다면 그 단 오분은 어쩌면 상대방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일이 되기도 한다. 무엇을 위해 사느라 그렇게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생각할 수록 온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백은또 한번 그 잠깐의 시간을 못내준 죄책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희는 어린나이에 둘째를 나았다. 어린나이라는 것은 지극히 백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것이다. (객관적으로는 전혀 어린나이도 아니다.) 그것도 큰아이가 두 돌이 되기 전에 둘째를 나은 것이다. 둘재를 낳는 것을 백은 탐탁지 않아했다. 백은 희가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만 잘 키우면 됐지 둘째까지 키우는 것은 희가 얼마나 희생을 해야하는가에 더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누구나 아이를 키우면 희생은 물론이고 당연히 고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어려운 것 뿐만아니라 어지러운 세상이다. 이런 시기에 더더욱 아이를 둘 키운다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 말리고 싶었고 바라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 희는 둘째를 가졌다는 소식을 백에게 빨리 알리지 않았었다. 지금에 와서 그마저 미안하고 하나의 점을 남겼는데 지금 둘째를 낳은지 얼마 안되어 또 하나의 점을 남기고 왔다. 그동안 희를 키우면서도 많은 점을 남겼다. 그것도 블랙점만 남겼다. 이번에 또다시 너무나 큰 블랙점을 남기게 된 것이다.
백은 마음이 급했다. 약속에 가는것도 미뤄놓고 마무리 지을 일도 많은데 아기를 봐주느라 아무것도 손도 못대고 있었다. 이제는 가야지 하기를 여러번, 이번만 아기를 트림시키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겨주고 가야지 하다가 그만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말았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저녁이다. 사위가 퇴근하고 올 시간이다. 그전에 서둘러 가야지 했다. 사위가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지만 백은 이야기 하지 않았다. 백은 희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런데 희는 아기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방금 응가를 한 아기를 백이 씻어주고 눞혔는데 또 응가를 한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백은 택시를 불러달라고 한다. 희는 백이 간다는 소리에 이제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서는데 백은 아는지 모르는지 어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한다. 그 소리에 그만 눈물이 앞을 가리고 울컥한다. 조금만 더 있어주면 좋을텐데 무엇이 그리 급해 빨리 나가려고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아기를 낳고 조리원에서 나와 적응하기도 힘든데 백마저 가면 아무도 없는데... 백이 간다는 소리도 듣는둥 마는둥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애써 뒤를 돌아 앉았다.
멍하니 바라보는 두돌 안된 큰애를 보며 문을 닫고 나오는 백도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끝도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게 급하게 나와야 했나 싶다. 그것마저 갈아주고 좀 안정이 되면 나와도 되지 않았나 너무 후회가 됐다. 백은 그만큼의 마음의 여유라는게 없다는 것에 화가나고 속이 상했다.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백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덩그러니 둘, 아니 셋을 남겨두고 가면서 이제부터 희가 겪어야 할 몫들을 생각하니 울컥해졌다. 아무리 희가 원해서 나은 아기지만 두돌도 안되고 아직 분유를 손에 들고 있는 큰아이를 보면서 일말의 도움도 줄 수 없는 백은 한숨만 나왔다. 희는 백과는 달리 아기를 좋아했다.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수도 있지만 전형적인 현모양처라고 해야하나. 아뭏튼 백의 사고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런 희를 알기에 둘째 계획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지만 지금에와서도 전적으로 백프로 기쁘지 않은것은 변함이 없다.
백은 생각했다. 내 인생은 내 인생이고 네 인생은 네 인생인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었다. 서운해도 어쩔 수 가 없다. 하지만 돌아보니 내 인생은 무엇인가 싶은 것이다. 지금의 백의 상황을 그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뿐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일이 안 풀리고 백은 백대로 일이 안 풀리고. 버는 것보다 나가는 돈은 점점 커진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마음을 추스려 보지만 어느 날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세상에서 멀어지고 싶고 그만큼 사람들에서 세상에서 도태된 심정이다. 차라리 목숨이 사라지면 이 모든것이 편할까 하는 생각도 수십번 했다. 그럴 용기도 없다. 백은 존재감에 대해 생각해본다. 엄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희생이라고 할 만큼 애를 쓰면서 키워본적이 있는가. 그런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무엇에 허덕이며 살았는지 무엇에 정신을 팔고 살았는지 남는 게 없다. 희가 말했었다. 다른 무엇엔가 관심쏟을 만한게 있었겠지 하고. 딱히 없다. 부끄러운 일들밖에 생각안난다. 아이들이 외지에 나갔다 올 때도 항상 백은 바빴고 집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훌쩍 커버리고 같이 할 수 있는 시간은 더 없어졌다. 이제는 백이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져주지 못하고 아이들도 백의 인생도 책임져주지 못한다.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바쁘다. 그렇기 때문에 백은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웃픈 현실이지만 백세 시대, 재수없으면 150까지 산다고 한다. 길고도 긴 지금부터의 인생을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 요즘들어 상대적 빈곤감과 허털감이 몰려드는 백은 가끔 우울감에 빠져 넋놓고 있는 일들도 허다하다고 한다.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하면 막막하다. 막막할 뿐인 중년의 백은 다시 힘을 내어 커피한모금을 들이켜 마시고 일어났다.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인생, 스스로 씩씩하게 헤쳐나가야지 하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