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티브 라이프

세균학자 베링

2020. 7. 1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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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vaccine)’이라는 말은 ‘소’라는 뜻의 라틴어 ‘백시니아(vaccinia)’에서 유래

 

- 베링(Emil Adolph von Behring)

독일의 생물학자ㆍ세균학자. 한스도르프 출생. 1878년 베를린의 육군 군의학교를 졸업하고, 그 곳에서 군의관으로 6년간 일하면서 주로 화학실험실에서 감염성 질환의 병인 진단, 치료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파상풍에 걸린 다른 동물의 혈청을 주이바여 수동 면역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1891년 코흐의 연구실에서 근무, 코흐의 밑에 있으면서 코흐의 지도를 받아 '디프테리아에 대한 해결책' 혈청의 항균 작용에 대해 연구하여 디프테리아 혈청과 파상풍 혈청을 발견했고, 항독성 면역 요법으로 디프테리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밝혔다. (디프테리아는 균에 의한 점막이나 피부의 급성 감염증-1880년대 초에 한차례 대 유행한 적이 있음, 어린아이 10명 중 5명 사망) 연구 업적으로 1901년 노벨 생리ㆍ의학상을 받았다. 이 혈청 요법은 1892년에 상품화되어 디프테리아에 대한 일반적인 치료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1894년에 할레 대학 교수, 1895년에는 마르부르트 대학 교수를 지냈다. 저서에 <혈청의 치료의 실제직인 목표> <파상풍의 원인과 원인적 치료>등이 있다.1890년에 고호교수 밑에서 디프테리아와 파상풍의 독소 및 항독소에 의한 면역현성을 연구. 1893년에 디프테리아의 혈청요법에 성공. 말브르그 대학 부속 디프테리아 항독소연구소에서 치료혈청을 대량 제조해 본증의 사망률을 떨어뜨리는 업적을 남김. 1901년 제1회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 디프테리아
디프테리아균의 감염에 의하여 일어나는 급성전염병. 법정전염병으로 주로 호흡기 점막의 침해를 받기 쉬운 어린이들에게 흔히 발생. 유행기는 겨울로, 도시에는 연중 볼 수 있으나 최근에 들어서는 비교적 보기 어려운 병.
- 면역혈청
혈청은 혈액이 완전히 응고된 후 혈액으로부터 분리되는 투명한 상층액을 말함. 면역혈청은 세균의 항원을 동물에 주사한 후 동물의 혈청에서 만들어낸 항원에 대항하는 물질.

 

 

 

 

어린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린 결과 
 제너의 종두법과 파스테르의  감염병예방 백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감염성 질병을 예방이 가능한지 알게 되었지만 이 방법이 모든 감염성질병에 유효한건 아니었다. 

박테리아는 세균이 방출하는 독소가 인체에 해를 일으키므로베링은 박테리아르 통째로 이용하는 대신 세균이 방출하는 독소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방법으로 예방백신을 제조한다. 디프테리아를 치료할 수 있는 30가지가 넘는 화학 합성물을 다양한 방법으로 동물들에 주사하면서 '요오드 트리클로라이드' 물질을 발견한다. 티프테리아에 걸렸다가 면역력을 동물의 혈청만이 디프테리아 독소를 파괴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를 항독소라 불렀다. 성능이 좋은 상독소 공장이 설립되고 3년이 채 못되어 2만여명의 어린이들이 예방주사를 맞게 된다. 이후 혈청 치료는 계속 발전되었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던 디프테리아는 더이상 치명적이지 않은 병이 된다.베링은 토끼를 이용한 실험결과에서 치사량이 적은 독소를 주입한 토끼는 이후 과량의 독소에도 감염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면역이 생긴 동물의 혈액에서 독소를 중화시키는 물질을 분리하는데 성공한다.  1890년 12월에 면역이 생긴 동물의 혈액에서 중화물질을 분리하는 면역혈청요법을 개발해 발표했고 병에 걸린 환자에서 채취한 항채가 포함되있는 혈청을 투여함으로서 그 효과를 인정받았다.

면역혈청요법은 수동요법에 해당되는데 제너와 파스테르가 확립한 능동면역요법과 대입되는 새로운 개념의 예방접종요법이라 할 수 있다.면역혈청요법이 상품화되면서 디프테리아의 치사율이 감소되었고 감염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척함으로 그의 명성은 높아지게 되었다. 1901년에 베링의 최초의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베링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일본으로부터  기타 사토에게 돌아갈 노벨생리의학상을 베링이 가져갔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 이유는 기타사토와 베링의 연구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베링보다 3년 먼저 코흐의 연구실에 유학온 기타 사토는 '파상풍과 디프테리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처음 코흐의 연구실에서 일하게 된 베링은 먼저 유학온 기타사토에게 연구방법에 대한 도움을 받아야 했다. 1890년 12월에 발표된 동물실험에 나타난 디프테리아와 파상풍 면역의 발생과정의 논문은 베링과 기타사토는 공동저자였다. 그후  디프테리아 중심 논문은 베링이 작성했고, 파상풍 중심 논문은 기타사토가 작성했다. 내용을 비교하면 대상균중 이외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베링의 연구 주제가 디프테리아였지만 그때까지 베링이 디프테리아를 치료할 수 있는 화학물질에 대한 연구를 주로 진행했고 혈청요법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증거부족으로 베링과 기타사토와 연구분담을 어떻게 했는지 확인은 어렵지만 연구를 먼저한 기타사토에게 베링이 도움을 받아야 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기타사토가 노벨수상을 못한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지도교수 코흐는 왜 첫번째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까?

베링과 기타사토가 디프테리아 파상풍 예방법을 연구하던 시점에 코흐는 결핵균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코흐는 결핵균 치료제 개발에 실패했고 기타사토는 1892년에 일본으로 귀국했다. 연구진행에 대한 의견차이로 베링은 1994년에 할레대학으로 옮긴다. 코흐가 투베르클린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는 사이 베링은 학교와 학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여러 직위를 맡는 등 승승장구 했다. 코흐의 부진이라는 틈새 시장을 정치적 사회적 능력으로 파고 드는데 성공하며 1901년에 최초 노벨생리의학 수상이라는 영예를 얻는데 성공한다. 베링의 노벨생리의학상은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수상한 유일한 기록이다. 베링은 1913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연구소를 설립하고 1917년 세상을 떠나기전까지 의학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일본의 기타사토는 페스트균을 발견하여 일본의학발전에 공헌하였다. 베링의 노벨의학상 수상은 기타사토의 도움과 코흐의 시기적인 부진에 힘입어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약 30년걸친 학자로서 인생에서 베링의 끊임없는 연구와 역량을 발휘했다는 점은 높이 기릴것이다. 노벨상이라는 큰 영광은 훌륭한 착상 끊임없는 노력,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지식과 인내등이 동반되어야 주어지는 상이다. 우리는 전염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예방법으로 백신을 접종받는다. 백신이란 일종의 가짜 세균이다. 죽거나 기능이 약해진 병균, 또는 그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병균으로서의 자격미달이다. 그러나 이 병균을 몸에 접종하게되면 몸은 가짜 병균을 진짜로 알고 방어체계를 가동시켜서 진짜 병균이 침투해도 이와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다.  -지식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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