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커피를 안다는 것은
밤새 비가 또 억수같이 쏟아져내렸다. 바람은 얼마나 세게 불어되는지 나무가 통째로 뽑히는 것 같고, 이어지는 우당탕 소리는 곧 집이 어느 한구석 부서질 것 만 같았다. 에어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창문을 조금 열어놓았는데 너무 리얼한 소리들에 잠을 바로 들 수가 없었다. 한참을 비소리 바람소리 우당탕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창문을 닫았다. 조금, 아니 많이 조용해졌다. 그러고서도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얼마를 뒤척이다가 잠들었는지 알 수없지만 바닥이 꿉꿉한 느낌에 전기장판을 약하게 켜고 잠이 들었다. 잠결에 따뜻함을 느꼈고 조금은 덥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전기장판을 끄지는 않았다. 이 한여름에 전기장판이라니. 이해가 안갈 수도 있지만 애증하는 아이템중의 하나다. 덕분에 따스한 기온을 느끼며 약간은 푹 잠을 들수 있으니까.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람소리도 못듣고 깨어보니 7시가 넘어있었다. 7시반에 출발하자고 했었는데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무리 바빠도 모닝커피는 빼놓을 수 없어서 이틀전에 구입한 드립백으로 향긋한 아침을 열었다.
깊게 음미할 시간도 없이 한모금 마시고 종이컵에 부어 계단을 내려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출근시간대라 교통체증이 있지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도로는 한적했다. 다들 비가와서 더 일찍 서둘러 모두 가버린 것일까. 비오는 부산이다. 몇일전 기사에 폭우로 쏟아진 비로 지하도로에 갇힌 젊은 친구가 사고를 당했다는 기사를 읽고 내려온 터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지하도로를 피해서 가야겠다 했는데 네비게이션은 어떻게 알고 평소와 달리 지하도를 피해서 길을 알려주는게 아닌가. 신기도 하지. 다음부터는 이 앱을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현장에 남편을 내려주고 나는 근처 카페로 갔다.
지난번 눈여겨 봐두었던 카페다. 밖에서 볼때 엄청 큰 매장 같았다. 골목 빈자리에 주차를 할 수도 있었기에 부담이 더 없었는데 마침 카페 바로 옆에 주차공간이 하나 비어있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길래 노트북을 챙겨들고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9시에 오픈이란다. 시간을 보니 8시 35분. 기다림에 이력이 난지라 그정도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하고 차에서 브런치 글을 읽었다. 한편 두편 읽다보니 어느 새 9시 20분. 다시 노트북과 가방을 챙겨들고 카페안으로 들어오니 이미 와있는 사람도 있었다. 노트북을 켤 수 있는 곳으로 안내받아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쪽으로 갔다. 베이커리도 막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기에 마약옥수수 빵, 그 중 조금 저렴해서 하나 집어들고 커피주문하러 카운터로 갔다. 이곳은 처음인거지. 드립도 있네. 하지만 라떼를 주문을 하고 자리로 왔다. 조금후에 나온 라떼는 일단 보는 것만으로 내맘에 들었다.
어디를 가든지 나는 라떼아트를 먼저 본다. 라떼아트가 예쁘게 나오면 괜히 기분도 좋고 맛도 더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트가 개거품이거나 그냥 성의없이 나온듯 하면 기분은 썩 안좋다. 휴게소 커피가 대략 그런곳이 많이 있다. 핸드드립을 배우고 나서 요즘은 휴게소에서 커피를 사먹는 일은 거의 없어 다행이다. 아트가 엉망?인 라떼는 지금까지 마셔본 결과 맛도 그닥 좋았던 기억이 없다. 보기좋은 떡이 맛도 있다고. 유명한, 이쁘다고 소문난, 그런곳에서는 항상 먼저 라떼를 주문해서 마셔본다. 라떼가 맛있고 아트가 이쁘게 나오면 그집은 80% 합격하고 들어가는 편이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이쁜 라떼아트가 그려진 라떼가 테이블에 전해졌다.. 기분이 좋아서 사진을 찍었다. 몇일후면 카페를 인수받아 오픈을 하는 아들에게 사진을 보내줬다.. '이렇게 이쁜 라떼를 선사하기를..♡' 이라고 하면서. 몇일전 통화에서 그런말을 이미 했었지만 진심이었다. 엄마는 라떼아트가 이쁘게 나오면 기분이 좋다고.
아직 완벽하지 않다고 하는 아들에게 용기를 주며 한 말이었지만 마음도 그랬다. 라떼를 주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분좋음을 선사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진을 보고 "엄마 제주도 갔어?" 한다. 속으로 왠 제주? 했는데 '유동커피'가 제주도에서 시작이 됐나보다. 부산이라고 했더니 부산에 있는 '유동커피' 냐며 본인이 알고 있는 유동커피와 다른가 하며 유동커피 소개 글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니 같은 유동커피였다. 이곳 커피가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고 하며 원두하나 사줄수 있냐고 했다. 이틀전 드립백을 구입하면서 그곳도 로스팅하는 곳이어서 원두를 사서 보내려했는데 로스팅 날짜가 몇일 지나 보내지 못했었다. 카운터로 가서 사진을 찍어 보냈다. 세가지 타입이 있었다. 라떼를 반쯤 마셨고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지만 전혀 맛보지 못한 C타입으로 핸드드립 한잔을 더 주문했다. 아들은 A타입으로 원두를 부탁했다. 원두 포장 택배는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사두었다가 오늘 토요일이기 때문에 월욜 보내준다고 했다. 고맙다고 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그냥 기분이 좋다. 카페를 인수한다고 의논을 하길래 내려갔었다.
여자친구와 같이 한다길래 보자고 했었다. 그런데 인수하자마자 일주일이나 문을 닫고 더 준비를 한다는 말에 무슨 정신나간 소리인가 싶어 언성을 높이고 서로 기분이 상해서 돌아온적이 있는데 그게 마음에 아직 남아 있는 가운데 아들의 고맙다는 소리는 눈물나게 오히려 내가 고마웠다. 잘해보라는 응원의 말은 못해주고 하루라도 쉬면 되겠느냐, 하나씩 바꿔가면 되지 하며 정작 맘에 있던 말은 하나도 못하고 아들의 여자친구까지 기분을 통채로 상하게 하고 온터라 그동안 맘이 편하지 않았었다. 그동안 좋게만 갖고 있던 서로의 감정에 불신의 씨앗을 심어 주는 시간이 되고 말았었는데 조금은 그 기분이 사라지는 듯 했다. 아직도 아들보다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미안하고 상했던 기분을 되돌려 줄 수 없었던 터라 여전히 마음한구석은 찝찝하다.
C타입 핸드드립 한잔이 유동커피 이니셜이 새겨긴 머그잔에 담겨 나왔다. 그제서야 유동커피가 궁금해졌다. 본점은 제주도에 있었다. 부산에 몇군데와 울산에 매장이 있다는 것을 검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직 서울은 입성을 안했나보다. 뭐든지 그 지역에 어울리는 곳이 있다. 그곳만의 특색을 어쩌면 한정해서 매장을 운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것 같다.
그곳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그런 것. 캐릭터의 이미지는 약간 장발에 콧수염이 그려진 약간은 아티스트적인 캐리커쳐였다. C타입의 원두는 브라질, 블랙다이아몬드, 인도 카피로얄이 블랜딩된 커피였다. 헤이즐럿, 아몬드, 호두, 넛트의 향이 느껴지는 커피. 개인적으로 헤이즐럿을 좋아하지 않는데 고소한 커피인데 헤이즐럿이 들어갔다고? 약간은 망설여졌지만 고소한 커피라고 해서 C타입을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걱정했던 헤이즐럿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몇모금을 마시고 나서야 아주 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약간 탄내가 나는 듯도 했지만 묵직한 바디감이려니 하고 계속해서 음미를 해보았다. 그러는 사이 커피는 식었다. 식은 커피는 오히려 더 깔끔했다. 뒷맛이 약간은 묵직하면서 깔끔한 것이었다. 욕심같아서는 산미가 있는 A타입도 마셔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빈속의 커피라 더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식은 다음에야 헤이즐럿 향을 오히려 더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미미하게 느끼는 정도에 그쳤다. 약간 묵직하면서 쌉싸름하면서 뒷맛은 깔끔하다고 해야할까..고소하다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 더 음미를 해보면 알 수 있을까 혀끝에 남는 뒷맛이 매우 쌉싸름하다. 이것이 고소하다고 하는 걸까 혀를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
비가 얼추 그친것 같다.. 슬슬 나가봐야 할 시간이 됐다. 카페에 오래 앉아 있으면 커피와 베이커리등 몇번을 주문하고도 왜이렇게 미안한지. 아직은 젊은 세대에 끼이지 못한 구세대임을 인증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적당히 자리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간에 자리를 비워주는 게 예의인냥 항상 그렇다. 어떤 사람은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해놓고 몇시간도 앉아서 시간때우기를 하고 있던데 그나마 장소가 넓은 곳이면 덜 미안하지만 좁은 매장에서는 눈치가 보인다. 기본적으로 커피는 두잔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들어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불편해 질때가 있다. 그런데 오늘은 가야겠다고 나오면서 시계를 보니 카페에서 있은 시간이 무려 5시간이나 되었다. 세상에나! 전혀 지루하지 않았는데 그동안 난 무얼했지?무튼, 아들을 주기위한 원두 구입을 했으니 조금은 당당하려나. 내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좋은 커피를 안다는 것은 비오는 날 집에 갔다오기 애매한 날, 아들이 좋아하는 커피를 전해줄 수 있는 날이어서 이런 날 더 행복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