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티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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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한다. 딸이 결혼식에 못 갈 사정이 생겼다며 대신 가줄 수 있냐고 전화가 왔다. 신랑도 출장을 갔는데 결혼식 시간에 맞춰 갈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딸의 결혼식 때 친구의 엄마도 함께 와서 축하를 해주었었다. 딸의 친구는 고등학교부터 친구라서 나도 잘 아는 사이였다. 물론 집안 사정같은 거야 속속들이 알 수 없는 관계지만 친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친구가 결혼하는데 가지 못해서 미안해서 어쩌냐며 속상해하며 부탁을 했다. 딸의 친구는 코로나로 인해 전화 오는 사람마다 못 간다는 말밖에 없다며 울 먹었다고 했다. 마음이 짠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 있는데 기꺼이 가야지 하며 얘기를 하다가 축의금 얘기가 나왔다. 나는 축의금에 대해 별로 고민을 안 하는 편이다. 그때 사정에 따라 하지만 기본은 정해놓고 하니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친구는 얼마를 했는지 알고 있는데 친구의 엄마도 축의금을 냈는지 안 냈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대로 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축의금 하니 떠오르는,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는 사건이 하나 떠오른다. 딸의 친구가 아닌 내 친구와의 이야기이다. 친구 아들이 몇 년 전에 결혼을 했다. 멀리서 오는 친구도 있어서 축하를 하기 위해 친구들과 1박을 하며 결혼식에 갔었다. 결혼식 당일 축의금을 얼마를 해야 되나 얘기를 하다가 한 친구가 이 정도면 될 거야 하면서 결론을 지어주길래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덜 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나도 그 당시에 조금은 한 푼이 아쉬웠던 때라 더 이상 고민 없이 그대로 하고 말았는지 모른다. 다른 한 친구도, 나도 그렇게 축의금을 냈다. 그리고 결혼식은 축복 속에 마무리되었다.

 

며칠 후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결혼식 때 와줘서 고맙다는 전화인 줄 알고 반갑게 받았다. 그런데 내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얘기해준다고. 딸 결혼식 때 축의금을 본인은 얼마를 했는데 나는 덜 했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을 못 하고 그렇게 한 것 같다고. 순간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머 그러니? 어쩌냐 지금이라도 송금해줄까?" 나는 농담 반으로 얘기했다. 친구는 그걸 받으려고 한 게 아니라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알려줄 건 알려줘야 될 것 같아 전화한 거라 했다. 본인의 딸 결혼식 때 많이 하라며 웃으면서 서로 좋게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나는 한동안 그 전화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 분명하다. 축의금이라는 잣대에 친구를 올려놓고 저울질했다는 거에 일단 나는 미안하고 미안했다. 그렇다고 그 친구와 다른 친구와 다르게 생각한 적은 없다. 그냥 내 친구일 뿐이다. 그런데 축의금을 왜 의논했을까. 아직까지 그 친구는 내 마음속에서 다른 친구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의심해본다. 같이 결혼식에 갔던, 축의금을 결론 지어주었던 친구에게 그러한 전화가 왔었다고 했더니 " 어머나!! 품앗이 라더니 무섭다!"라고 했다. 나와 같은 금액을 축의금으로 낸 친구도 할 말을 못 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일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내 마음속에서는 그 친구와 더 소원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안되어 한 친구의 시어머니 장례식장에 가게 되었다. 그 장례식장에서 그 친구와 만났다. 그때 일로 마음이 무거웠었다고 미안했다고 다시 한번 사과의 뜻을 전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다 잊어버렸다고 그리고 다 털어버렸다고 얘기했지만 왠지 그 순간이 더 어색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나라면 만약에 친구가 내가 낸 축의금보다 덜 했다면 그 친구에게 전화해서 알려줬을까. 나는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축의금이라는 건 형편에 맞게 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는 무리를 해서 더 할 때도 있다. 그건 형편에 맞게 하는 건 분명 아니다. 만약에 내가 형편이 안 좋아서 그렇게 했다면 내 마음이 어땠을까. 그랬더니 한 친구가 형편이 안 좋으면 얘기를 해야지 한다. 형편이 안 좋은 사람이 나 형편 안 좋아서 이만큼 밖에 못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미안해서 못할 것 같다. 결혼식에도 가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전화를 해서 나는 이만큼 했는데 너는 요만큼밖에 안 했다고 전화를 건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계산적으로 야무지고 돈에 대해서 분명하고 솔직하게 한다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꼭 그렇게 결혼식이 끝나고 며칠 안돼서 전화를 해야 했을까. 모임도 있을 거고 언젠가 만나면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더라면 내입장에서 아마 덜 서운하고 더 미안했을 것이다. 지극히 친구 입장이 아닌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마음적으로 그 친구와 소원해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쉽게 떨쳐버려지지 않고 마음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지던 어느 날 얼마 전에 그 친구의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내가 멀리 있는 줄 알지만 바로 가겠다고 다른 친구에게 전했다. 코로나로 인해 지금은 장례식장에도 못 오게 한다는데 그 친구는 그런 일말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다른 일이 있어 못 온다는 친구와 통화에서 한 얘기다. 친구 남편인데 꼭 가야 하는데 하면서 그 친구는 너무 미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또 달랐다. 다른 때 보다도 궂은일에는 더구나 찾아가야 한다지만 그것도 형편이 되면 가는 거고 아니면 못 가는 건데 왜 사람들은 못 가면 서운해하고 흉을 보거나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인지 모르겠다.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 같은 금액의 축의금을 냈던 친구와 만났다. 장례식장에서 상을 당한 친구와 셋이 잠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다른 친구와는 나와서 근처 카페에 들렸다. 상을 당한 친구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때 축의금얘기도 했다. 그 친구도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고 얘기를 했다. 돈에 관해서 똑 부러지고 야무진 친구라 생각하라며 서로 위안을 하고 헤어졌다. 나이가 이만큼 먹도록 아직까지 돈에 대해 불편하다니. 편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불편하게 한다. 장례식, 결혼식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행사에 따르는 사소한 예의 하나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나 싶은 게 나이 헛먹었다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너무 편한 대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나 자신을 의심해본다. 격식, 형식 다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틀대로 살아갈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축의금, 부의금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상대방과의 안면을 생각해서, 친하고 덜 친하고를 따지고 덜 하고 더하고. 정말 불편한 진실이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된다는 이치는 어디에서 오는 건지. 덜할 수도 더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야말로 형편에 맞게 말이다. 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와서 축하를 해주되 돈은 들고 와라. 이 뜻?? 그렇다면 진심으로 축하는 없는 듯하다. 모두는 어쩌면 마음의 부담을 안고 가는 게 아닐까 싶다.

 

언젠가 뉴스에서 본 결혼식 축의금을 안 받은 연예인 커플이 생각난다. 물론 그들은 재력가의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객이 1000명 정도였는데 축의금은 0원. 어떤 식으로든 축하를 해줄 사람은 해줬겠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니 딸의 결혼식 때 아는 분이 생각보다 축의금을 너무 조금 낸 것이 떠오른다. 그럴 형편도 그럴 사람도 아닌데 잘못 낸 걸까 눈을 의심했었다. 그런데 알 수가 없다. 왜 그분이 그 정도밖에 안 했는지. 아니 어쩌면 그 정도가 최선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그분의 가게에 가서 먹을 사람도 없는데 몇인분을 포장해서 온 적도 있다. 그렇다고 왜 그 정도밖에 안했냐고 따질 것인가. 나는 할 수 없다. 몇 번을 생각해도 안 한다. 누가 얼마를 하고 안 하고 따지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분의 축의금에 의아해하며 약간은 서운했었다. 축의금 때문이 아니라 그분과의 친분관계를 생각하니 서운했었다. 친구도 그런 마음이 충분이 들었을 것이다. 친구라면서. 남들도 아닌 친구라면서. 남이라도 그만큼 할 텐데 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말에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친구라면서 그 말에 더욱 미안하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 축의금은 모두에게 고민이고 짐인 건 분명한 것 같다. 받을 때는 좋지만 누군가에게 줄 때는 공돈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 번도 품앗이라는 말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꼼꼼하지도 않다. 그렇지 못한 것이 잘 못 된 건지도 모른다. 친구의 말대로 기억을 해두어야지 그걸 잊어버리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모두 나를 질책할 뿐이다. 잘못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100번을 말해도 다 내 탓이다. 그런데 서운한 건 왜일까. 나는 서운한게 있어도 빨리 잊어버리는 성격인데 지금까지 100% 가시지 않고 앙금이 남아있는 걸 보면 어쩌면 그 친구가 더 뒤끝이 없는 친구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뒤에서 서운하다느니 하면서 흉을 보고 있는 나보다는 더 분명하고 확실한 친구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일본어에서 물건을 줄 때 ささやかなですが。つまらないものですが。는 말이 있다. 소소한 이 말을 좋아한다. 일본 사람들은 선물을 할 때 정말 이것도 선물이라고 할 수 있나 싶은것도 정말 소중하게 포장해서 준다. 뒤에서 흉을 보든 말든 정성껏 준비하는 그 마음. 선물이건 축의금이건 마음이 중요할진데..조금은 씁쓸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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